카테고리 없음

건축과 젠더. 공간은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작동할까?

이코노어 2026. 1. 22. 15:51

건축과 젠더. 공간은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작동할까?라는 질문은 우리가 매일 드나드는 공간이 과연 모두에게 같은 경험을 주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건축과 젠더. 공간은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작동할까?
건축과 젠더. 공간은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작동할까?

 

1. 일상 공간은 정말 모두에게 같은가

우리는 집과 학교, 회사와 거리 같은 공간을 누구나 똑같이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왔습니다. 벽과 바닥, 문과 창문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중립적인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남성과 여성에게 공간은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서부터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전통적인 주거 공간에서는 부엌과 거실, 안방의 쓰임이 분명히 나뉘어 있었습니다. 부엌은 오랫동안 여성의 공간으로 여겨졌고 집 안의 중심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많은 노동이 요구되는 장소였습니다. 이 공간의 구조는 여성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고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좁고 분리된 구조는 집안일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그 노동의 가치를 가리기도 했습니다.

반면 남성이 주로 머무는 공간으로 인식되던 서재나 거실은 비교적 넓고 밝게 설계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자 외부와 연결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중심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공공 공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밤길이나 지하 공간은 남성과 여성에게 전혀 다른 감각을 주었습니다. 남성에게는 단순한 이동 통로였던 곳이 여성에게는 긴장과 경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조명의 밝기, 시야의 확보 여부, 사람의 흐름은 안전과 직결되었고 이는 성별에 따라 체감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화장실이나 탈의실처럼 성별에 따라 나뉜 공간 역시 중립적이지 않았습니다. 여성 화장실은 늘 줄이 길었고 공간은 부족했습니다. 이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사용 시간과 방식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늘 기다려야 했고 공간은 불편함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일상 공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삶의 방식과 몸의 경험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기준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이었고 여성의 경험은 주변으로 밀려났습니다. 공간은 말없이 사람에게 역할과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2. 여성의 몸과 경험이 배제된 설계

건축은 눈에 보이는 형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어떤 몸을 기준으로 삼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건축은 평균적인 남성의 신체와 생활 방식을 기준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그 결과 여성의 몸과 경험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었습니다.

계단의 높이와 보폭, 손잡이의 위치, 문의 무게는 모두 특정한 힘과 키를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많은 여성은 무거운 문을 열거나 높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고 설계의 문제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임신과 출산, 돌봄의 경험 역시 공간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이동하기 어려운 보도블록과 계단,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여성의 이동을 제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회 활동의 범위를 좁히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직장 공간에서도 여성의 경험은 뒤로 밀려났습니다. 휴식 공간이나 수유 공간은 뒤늦게 추가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는 일하는 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결국 여성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참아야 했고 공간은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공공 시설의 안전 설계 역시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비상벨의 위치나 주차장의 동선, 골목의 구조는 실제 위협을 경험하는 여성의 시선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늘 주변을 살피며 움직여야 했고 공간은 자유보다는 긴장을 먼저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러한 배제는 의도적인 차별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관습의 결과였습니다. 문제는 그 관습이 계속 반복되며 불평등을 고착시켰다는 점이었습니다. 공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누구를 환영하고 누구를 소외시키는지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3. 젠더 감수성을 품은 공간의 가능성

최근 들어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건축이 단순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 속에서 젠더를 고려한 공간 설계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습니다.

젠더 감수성을 가진 공간은 특정 성별을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방향을 지향했습니다. 여성과 남성, 아이와 노인 모두가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습니다. 이는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공평함의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공공 화장실의 설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용 시간과 동선을 고려해 공간을 재배치하고 누구나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의 경험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주거 공간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부엌과 거실의 경계를 허물고 돌봄과 노동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는 시도가 늘어났습니다. 이는 가족 내 역할을 자연스럽게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간이 바뀌자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안전을 고려한 설계 역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밝은 조명과 열린 시야, 예측 가능한 동선은 불안을 줄였습니다. 이는 여성만을 위한 변화가 아니라 모두에게 편안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성별을 넘어 삶의 여유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젠더를 고려한 건축은 특별한 이론이 아니라 삶을 자세히 바라보는 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공간은 더 이상 중립적인 그릇이 아니라 사람의 경험을 담아내는 살아 있는 구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건축은 이제 질문을 던집니다. 이 공간은 과연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누구를 놓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